설립자 일송 윤덕선
“내가 살아오면서 좌우명으로 늘 가슴 속에 담아온 것이 있다.
그것은 항상 이 민족을 위해 땅에 묻힐 주춧돌이 되자는 것이다.”
Ⅰ. 꿈과 신앙
꿈 많은 소년
일송 윤덕선은 1921년 1월 평안남도 용강군 금곡면 우등리에서 태어났다. 우등리는 일제 강점 직후 공립보통학교가 들어설 만큼 교육 여건이 좋았다. 일송은 이곳 광량만 공립보통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접했으며 1933년에 졸업할 때까지 꿈 많은 소년기를 보냈다.
1940년 금곡 공립보통학교 전경
신앙
용강군은 진남포 항구와 가까워 가톨릭과 개신교가 일찍 들어왔다. 일송의 집안도 5대조 때부터 가톨릭 신앙을 지켜왔으며 일송은 독실한 가톨릭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938년 광량만 천주교 청년 인애회
(앞줄 왼쪽 세 번째에 일송 부친,
뒷줄 오른쪽 세 번째 일송)
Ⅱ. 배움의 길
평양고등보통학교
일송은 1933년에 평안도의 최고 명문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38년에 졸업했다. 성실하고 활달했으며 급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은사들은 그에게 ‘일송一松’이라는 호와 ‘주춧돌이 돼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1938년 평양고보 졸업반 시절
경성의학전문학교
일송은 1939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 공부에 정진하였다. 의학 공부 외에도 인문, 사회과학 서적을 왕성하게 읽었는데 이때 익힌 폭넓은 공부는 훗날 병원 경영자와 교육자의 삶을 사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41년 경성의전 조선인회 모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사 전경
백병원 수련기
일송은 1942년에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백병원 외과의원에서 수련의를 보냈다. 그곳은 경성의전 교수를 역임한 스승 백인제가 세운 병원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회진, 수술, 당직이 이어지는 ‘전동차 같은 수련기’를 보내며 외과 의사의 소양을 연마해 나갔다.
1944년 백인제 외과의원 사람들
장기려 박사가 그린 백인제 트리
Ⅲ. 도전하는 청춘
개원과 백병원 재건
1945년 초 일송은 백병원을 그만두고 고향 용강온천에서 성심의원을 개원했다. 처음으로 세운 병원이었다. 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충남 홍성에서 다시 성심의원을 개업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파란만장한 피난 생활을 마친 후 1951년에 백병원 재건에 참여하였고, 미군 121 후송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저장혈액 및 임상병리 기술을 습득하여 혈액은행 창설을 주도하였다.
백병원에서 동료들과 함께
1953년 백병원 수술실
미국 유학
미 군의관의 권유로 미국 유학을 결심한 일송은 한미재단의 유학생 지원프로그램에 합격하여 1954년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일송은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Bridgeport 병원에서 선진화된 의학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의술 스타일을 정립하였다.
1954년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서 가족과 함께
브리지포트 병원 스태프 시절
Ⅳ. 열정의 의사
가톨릭 의과대학 부임
일송은 1956년에 귀국하여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 의과대학)를 책임지게 되었다. 이곳은 1954년에 출범했으나 운영이 어려워, 책임자인 양기섭 신부가 일송을 부른 것이었다. 일송은 우수한 교수진과 무한한 열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가톨릭 의대는 1회~3회 졸업생 전부를 국가고시에 합격시키며 단기간에 의학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
집무실에서의 일송
1958년 일송과 가톨릭 의대 학생들
가톨릭 의과대학의 성장
가톨릭 의대와 병원은 나날이 성장하여 1961년에 당시 국내 최대의 병원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가톨릭중앙의료원(CMC)이 세워졌고 일송은 초대 의무원장으로 취임하여 강한 추진력으로 가톨릭의료원과 의과대학을 성장시켰다. 그러나 경영진인 신부들과 마찰이 생겨 가톨릭 의대를 떠나 새로운 길을 나서게 되었다.
1960년 제1회 졸업식 기념사진
1963년 외과학교실 동료들과 함께
Ⅴ. 새로운 시작과 성장
한국의과학연구소 설립과 필동성심병원
일송은 뜻을 같이하는 10여명의 의사와 함께 1968년 사단법인 한국의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서울 중구 필동에 부속병원인 필동성심병원을 개원하고 초대 이사장 겸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필동성심병원은 한국 최초의 민간 종합병원이었다.
한국의과학연구소 부설 성심병원
필동성심병원 옥상에서
한강성심병원 개원과 의료재단의 출범
일송은 1971년에 한강성심병원을 개원하였다. 그의 첫 개인 종합병원 설립이자 우리 의료원의 기원이었다. 한강성심병원은 의료서비스가 열악했던 영등포 일대의 건강 보루로서 성장하였다. 1974년에는 의료법인 성심중앙유지재단을 설립하였다.
한강성심병원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일송
한강성심병원 개원
성심자선병원과 괌 마리아나 의료원 운영
일송은 1975년에 설립되어 성심자선병원을 설립하고 영등포 일대의 영세민 환자를 돌보는 인술을 시행하였다. 1977년에는 미국 가톨릭 괌 교구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령 괌의 마리아나의료원을 위탁 운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의료사업이었다.
일송과 성심자선병원
마리아나 의료원 전경
병원왕의 기적
일송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여러 병원을 설립하였다. 1977년 서울 청량리의 서울동산병원을 인수하여 동산성심병원을 개원하였고, 1980년 서울 대림동에 강남성심병원, 1984년 강원도 춘천에 춘천성심병원, 1986년 서울 강동구에 강동성심병원을 잇달아 설립하였다. 그를 두고 ‘병원왕’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동산성심병원 인수
강남성심병원 공사 현장
춘천성심병원 개원식
강동성심병원 개원 축하연에서
Ⅵ. 미래를 위한 주춧돌
일송학원과 한림대학교 탄생
일송은 일찍부터 의학 교육과 연구를 위한 의대 설립을 희망하였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의대 설립을 준비하였고 1981년 기존 법인을 학교법인일송학원으로 변경하고 1982년 3월에 한림대학(현 한림대학교)을 개교하였다.
한림대학 개교 당시 일송과 이사진, 교수진
제1회 한림대학교수 연찬회
한림대학교의 발전과 교육사업의 확대
일송은 교육에 많은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한림대학은 명문 사학으로 성장하여 1989년에 종합대학 ‘한림대학교’가 되었다. 1984년에는 춘천간호전문대학(현 한림성심대학교)을 인수하였다. 일송학원은 그의 뜻을 계승하여 2004년 서울에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를 개교하였다.
종합대학교 승격 현판식
1992년 8월 22일 춘천전문대학 준공 기념 축하 행사
한림성심대학교 전경
Ⅶ. 사랑과 성찰
신앙인 일송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한 일송은 사랑과 봉사 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하였다. 일송에게 신앙은 ‘신 앞에서 그대로의 나를 들여다보고, 기도를 통해 스스로 반성하며 남을 위해 축복을 비는’ 비움과 묵상, 그리고 영원에 대한 깨달음이자 진실한 마음의 회복이었다. 그의 신앙은 인술의 실천과 사회봉사로 구현되었다.
백령도 의료봉사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인술과 봉사
일송은 한강성심병원 건립과 동시에 무료 진료를 펴고, 1975년에 성심자선병원으로 운영하였다. 장애인을 위한 복지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점자도서실을 설치하였으며, 나환자를 위해 천주교 구라회를 운영하였다. 1980년에는 서울보건연구회를 창설하여 의료의 사회화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였다. 1980년대 이후 신림복지관, 성심복지관 등을 건립하여 체계적인 사회복지를 실천하였다.
제1차 서울보건연구회 세미나
맹인점자도서실 입구
1992년 10월에 개관한 성심복지관
성찰과 저술
1990년대 일송은 기초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한림과학원을 창설하여 학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학계의 석학들과 함께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교수·교사의 연구와 저술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한 글을 집중적으로 저술하였다.
한림과학원 현판식
제5회 한림과학원 수요세미나에서 박경리 여사와 함께
일송의 저술 및 유고집
숨은 거인
의사, 교육자, 사회사업에 일생을 헌신한 일송 윤덕선은 1996년 3월에 향년 75세로 타계하였다. 각계 각층에서 그를 애도하였고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영결식
2대 이사장 도헌 윤대원
“강력한 응전자로 나아갈 시간이다.
높은 기개 속에 지평을 넓혀 한림의 원대한 꿈을 향한 굳은 정진의 의지를 다짐한다.”
Ⅰ. 생명에 대한 경외심
자연을 사랑한 소년
도헌 윤대원은 1945년 6월 평안남도 용강에서 윤덕선과 윤봉옥 부부의 맏이로 태어났다. 해방과 전쟁 시기의 어려움을 겪었고 서울의 용산중학교와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을 좋아하여 식물에 관심이 많았고 연구하기도 했다.
1958년 용산중학교 재학 시절
‘전국학생생물연구발표회’ 1등상 수상
의사로 가는 길
고교 졸업 후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으나 부친을 이어 인술(仁術)을 펼치는 의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가톨릭대학 의과대학에 편입했다. 당시 외과 교수로 명성을 날린 이용각 교수는 그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전공의 시절에는 교수, 동학들과 함께 덕적도 등에서 무료 진료를 수행하며 주민들의 애환을 체험했다.
가톨릭 의과대학 시절
Ⅱ. 인술(仁術)을 펼친 명의
천부적인 외과 의사
도헌은 1974년에 한강성심병원 외과에 부임하며 본격적으로 의사의 길을 걸었다. 1979년에 미국 명문 컬럼비아대학 외과학 교실에서 첨단 의학을 접했다. 귀국 후에는 강남성심병원 외과 과장으로 환자 진료에 매진하였고 1987년에 국내 최초로 췌장 이식 수술에 성공하여 한국의 의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1987년 국내 첫 췌장이식 수술 성공 뉴스 인터뷰
인술의 실천
의사의 길을 걷는 와중에도 인술(仁術)을 놓지 않았다. 1975년에 성심자선병원이 개원하자 부원장으로서 영세민을 위한 무료진료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순회무료진료에도 열심이었고 재해가 발생하면 긴급의료팀을 이끌고 현장에 달려가 고통을 덜어주었다. 이른바 ‘달동네’로 불렸던 빈민촌에 장학금 지원을 비롯한 종합 복지 사업도 지원했다.
1976년 1월 신정동에서의 무료진료
1978년 4월 당산동 순회 무료진료 현장에서
Ⅲ. 시련을 딛고
사경에서 탈출한 불사조
도헌은 한강성심병원 원장과 한림대학교의료원장을 역임하며 병원 경영에서 차근차근 성과를 거두었고 1989년 11월에 일송학원의 2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병마가 찾아왔다. 10여 년에 걸쳐 죽음의 고비를 두세 차례 넘길 정도로 시련은 길고 깊었다. 1996년에는 부친 윤덕선 명예이사장이 갑자기 별세하였다.
병마를 견디며 재단과 의료원 전반을 책임져야 하는 절박한 지점에 서게 된 것이다. ‘언젠가는 어차피 죽을 목숨, 최소한 발전을 시키고는 죽자’라고 결연하게 다짐했다.
기적적으로 병마를 극복하고 열정을 다시 불태운 그를 두고 ‘사경에서 탈출한 불사조’라는 탄성이 나왔다. ‘IMF 사태’는 도헌의 귀환을 알린 첫 시험대였다.
내우외환의 어려움 속에서 그는 1999년 한림대학교성심병원을 성공적으로 개원하였다. 그의 경영 스타일은, 선이 굵고 거침없었던 부친과는 또 다른, 섬세하고 착실한 방식이었다.
1988년 한림대학교 학위수여식
1996년 한림대학교성심병원 건설 현장에서
1999년 3월 6일 한림대학교성심병원 개원식
약자를 살피며, 고통을 분담하며
일송학원 산하 병원과 복지관은 IMF 사태로 인한 고통을 나누기 위해 노숙자, 영세민, 결식아동을 위한 여러 사업을 벌여나갔다.
2000년에는 안양복지관과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을 잇달아 개관했다. 도헌은 2000년에 난곡 주민들을 위해 2000만 원을 희사했고 이 자금이
‘생활 위기 기금’이 되고 다시 신림복지관과 새천년민주당이 참여한 ‘SOS 기금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이 사례를 기반으로 2006년 ‘긴급복지지원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신림복지관 전경
나래울종합사회복지관
화상환자를 위한 지원
2008년 한강성심병원에 사회복지법인 한림화상재단이 출범하여 화상환자들을 위한 사랑과 나눔을 부단히 실천하였다.
한강성심병원은 화상 치료의 메카가 되어 세계적으로도 높이 인정받았다. 이는 도헌이 선친의 뜻을 계승하여 꾸준한 투자와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명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생지옥 같은 화상 치료를 누군가는 해야만 했다. 아무도 안 하니까, 우리라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한강성심병원은 2006년에 국내 유일의 화상전문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되었다.
한림화상재단 활동
한강성심병원 화상전문응급의료센터
Ⅳ. 정직한 경영인
첨단 병원의 실현
도헌은 나날이 발전하는 의료 과학에 부응하는 새로운 병원을 준비하였다. 경기도 화성시의 동탄 지역에 그는 새 병원을 차근차근 준비하였고 2013년 동탄성심병원을 개원하였다. 동탄성심병원은 환자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하고 친환경, 최신 의료과학, 멋진 외관을 구비한 첨단 병원이었다.
동탄성심병원 상량식 모습과 동탄성심병원 전경
자유롭고 소탈한 경영자
도헌은 의료 현장과 교육을 누비면서도 항상 독서하며 자신을 정진했다. 그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정직이었다.
그는 ‘정직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정직해질수록 자유로워졌으며, 그 자유로움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소탈하고 검소한 풍모도 그의 상징이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편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즐겼다.
병원의 운전기사, 목공실 직원, 경비원, 청소 직원들과도 두루 친하게 지내곤 했다. 신입 직원들이 그를 병원에 들른 동네 할아버지로 착각했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였다.
집무실 책
한강성심병원 생일축하
앵무새와 도헌
Ⅴ. 세계를 향한 마이티 한림
마이티 한림 선언
도헌은 2003년에 세계화 시대를 맞아 의료원이 세계적 역량을 갖추고 시대 변화를 주도한다는 취지에서 ‘마이티 한림Mighty Hallym’을 주창했다. 주간 화상회의를 주재하며 혁신을 주도하였고,
병원 경영자 과정 및 직원들의 혁신 아이디어 경진대회 등을 개설하여 인재 양성과 경영 개선을 꾀하였다.
2003년 6월 Mighty Hallym Leader’s Day
2006년 마이티 한림 2기 선포식에서
2010년 마이티 한림 3기 비전선포식
국제 학술교류를 선도하다
2006년에 시작한 마이티 한림 2기부터는 국제 학술교류에 역점을 두었다. 도헌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스웨덴 웁살라대학 등 저명한 해외 의료기관을 직접 방문하며 교류 협정에 물꼬를 텄다.
2008년 2월 스웨덴을 방문한 윤대원 이사장과 일행
2008년 컬럼비아대학교 제프리 삭스 교수 등과 함께한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 관련 회의
ECO 한림의 환경 경영
기후 문제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2008년에 ‘ECO 한림 환경경영’을 선포하여 인간과 지구의 근본적인 관계를 고민하고, 기후 문제를 해결하는 환경경영에도 나섰다.
에코 한림 엠블럼과 2008년 에코 한림 환경경영 선포식
국경을 넘은 인간애
의료봉사와 지원에서는 국경도 뛰어넘었다.
의료봉사와 지원에서는 국경도 뛰어넘었다. 2005년 1월 쓰나미로 피해를 본 스리랑카 오지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했고,
2007년부터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함께 국제협력 사업을 꾸준히 펼쳐나갔다. 이라크를 시작으로 베트남, 케냐, 파라과이, 라오스, 카메룬 등에 의료지원을 꾸준히 펼쳤고,
한림화상재단과 함께 아시아 저소득 국가 화상아동 치료 사업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한편 2009년에는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 등이 이끄는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10만 불을 기부하여 아프리카 등지의 빈민 퇴치를 돕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일대의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일본 적십자에 1억 원을 희사했다.
스리랑카 지진해일 긴급구호 의료봉사단
이라크 아르빌 리즈가리 응급의료센터
직원 초청 연수 기념사진
파라과이 의료진 수료식
Ⅵ. 꺾이지 않는 응전
글로벌 플레이어의 비전
2019년 도헌은 ‘마이티 한림 4.0’을 선포하고 글로벌 플레이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결코 패자가 될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현실주의와 적극적 개방성과 불굴의 의지로 응전하고, 승리하자’라고 역설했다.
2019년 마이티 한림 4.0 비전선포식
아시아 최초 린네상 수상
2020년 도헌은 스웨덴 웁살라대학교가 주관하는 린네 메달(Linnaeus Medal)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시상은 2023년에 거행되었다. 린네 메달은 식물학의 시조로 불리는 칼 폰 린네(Carl Linnaeus)을 기린 상으로 2007년 이후 매년 과학에서 우수한 업적을 거둔 인물에게 수여되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미셸 마이어 교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교수,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이 역대 수상자이다.
도헌은 한국과 유럽의 의학 연구 기반을 넓히고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발전시킨 업적을 높이 평가받아 선정되었다. 그의 수상은 아시아 최초이다.
2020년 린네 금메달 수상
린네 금메달
응전자의 삶을 마감하다
부친의 뒤를 이어 의사,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헌신하고, 시련에 맞서 응전자로 살았던 도헌 윤대원은 2024년 6월에 향년 79세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영결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