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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원 발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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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선 박사의 미국유학시절 리스트보기

이삼열 교수님께
부산항을 떠날 당시 윤덕선 명예이사장님의 가족 사진

일전 교외에서 교수님을 만나 뵈올 때 건강하신 모습이 매우 좋았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최근에 집필하신 교수님의 회고록 “내잔이 넘치나이다”를 단번에 일독하였습니다. 그 내용 중에서도 교수님의 건강하신 모습과 퇴임 후에도 후학들을 배려하시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윤덕선(전 일송학원 이사장) 박사의 글모음 “숨은 거인의 글” 속에서 미국 유학생활에 대한 내용은 한국동란 기간이 끝날 무렵 한미재단(韓美財團, American-Korean Foundation, AKF)이라는 곳에서 유학생을 선발하였는데 이 시험에 응시한 의사들은 대부분 세브란스 출신으로 약 50명이었다는 기록이었습니다. 선발된 사람은 2명이었다는데 저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데 이삼열 교수님과 윤덕선 명예이사장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에 교수님과 동승하셨고, 21일간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3박 4일간의 대륙횡단열차 여행 끝에 뉴욕에 도착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윤덕선 명예이사장은 코네티컷 Bridgeport 병원에서 병리학을 공부하셨고, 2년 후에는 개인집안 사정으로 국내에 돌아온 후 양기섭 신부의 권유로 가톨릭대학 의학부(당시 성신대학 의학부, 聖神大學 醫學部)를 떠맡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교수님과 통화한대로 이러한 기록에서 지난 1954년 미국 입국 전 단계부터 미국생활 중 교수님과의 교분관계, 교수님께서 파악하시는 윤덕선 명예이사장님의 미국생활, 양기섭 신부와의 교분 관계 및 귀국 후 국내에서 활동 사항 등을 알고 싶습니다. 글로써 기록하여 보내주시는 회고담은 “가톨릭의대 발전사”뿐만 아니라 “국내 의료계 역사” 기록에도 조그마한 보탬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미국 Bridgeport 병원 외과수련 당시 사진(뒷편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윤덕선)

한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내용은 윤덕선 명예이사장이 미군 121야전병원에서 냉장고, 진공병 및 임상병리 시약 등을 얻어 백병원(白病院)에 한국 최초로 혈액원을 개설했다는 회고담이 있습니다. 한국 혈액은행 발전사의 주역이신 교수님께서 더 자세하게 파악하시는 내용이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월들어 날씨가 무척이나 무더워지고 있습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항시 보람이 같이하는 나날이길 기원합니다. 요청에 응해 주신데 대해 다시금 감사드리며 또 소식 올리겠습니다.

[追]첨부하는 그림파일은 유고집에서 복사한 것인데 위쪽은 부산항을 떠날 당시 윤덕선 명예이사장님의 가족 사진이고, 아래는 미국 Bridgeport 병원 외과수련 당시 사진(뒷편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윤덕선)입니다.

2004년 6월 4일

조현찬 교수께

일전 전화와 함께 오늘 편지도 받았습니다. 백방으로 윤덕선 선생님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았으나 별로 신통한 것이 없었습니다. 겨우 찾은 것이 미국 유학 가는 배위에서 찍은 사진 한 장(1954년 8월초)과 브리지포트(Bridgeport)를 찾아가서 찍은 사진 한 장 (1955년 6월 5일) 뿐입니다. 졸저(拙著) “내 잔이 넘치나이다” 제2편 14~15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습니다.

“후일 의료계 거목이 된 윤덕선 박사도 뉴욕은 아니지만 가까운 코네티컷(Connecticut)애서 공부하면서 주로 뉴욕을 드나들었던 분이다. 비록 동창은 아니었지만 한배를 타고 온 인연으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그 분께서 일하시던 브리지포트(Bridgeport)에 좋은 일식집이 있어 어느 주말 그 곳까지 찾아간 일도 있었다. 이 분은 이 당시부터 유난히 포부가 큰 분이셨다. 백병원을 바탕으로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재건하겠다는 생각으로 경성의전은 아니었지만 가톡릭의대(구 성신의대 의학부)를 창설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또 한사람의 야심적인 사업가이자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양기섭(梁基涉) 신부의 맞장구가 있었다.

1956년 내가 피츠버그(Pittsburgh)로 옮겨갔는데 그 유명한 양 신부가 거기에 와 있었다. 가톨릭교회가 의과대학을 세우는데 모금하려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얼마 후 윤덕선 박사가 찾아왔다. 두 분은 서로 동기는 달랐지만 목표는 같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두 분이 힘을 모아 의과대학을 만들자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자금은 양신부가 맡고 교수진은 윤 박사가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우연히도 이 두분 모두 평안도 출신이자 독실한 가톨릭신자들이었다. 의기투함하여 가톨릭의대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되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갈라서고 말았다. 아마도 강자(强者)끼리 뭉친다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이상의 자료를 토대로 내 기억을 더듬어 윤 박사와의 관계를 정리하여 보면 대략 이렇게 됩니다.

내가 윤박사를 만난 것은 1954년 8월 초 부산에서 떠나는 미국화물선을 얻어 탔을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분은 한미재단(韓美財團, America- Korean Foundation, AKF)의 유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하여 그 배를 탔지만 나는 사연이 달랐습니다. 내 유학 자체는 한미재단과는 무관하게 거제도에 와 있던 미군 군의관의 알선으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다만 미국가는 여비를 절감하기 위하여 한미재단의 공짜 배편을 신청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화물선들은 한국 올 때는 전쟁물자를 싣고와서 돌아갈 때는 빈 배가 가는 것이니 기왕이면 가난한 한국 유학생들에게 좋은 일한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우리 배에는 객실이 네 개 있었는데 객실마다 2명씩 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윤 박사의 가족들은 부산까지 내려와서 전송을 나왔더군요. 우리 집사람은 갖 결혼한 "새댁" 이라 부산까지 갈 형편이 못되어 서울에서 그냥 작별하고, 시어머님만 부산까지 전송오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지요.

아래 사진에 보듯이 여학생이 하나 끼어서 우리 일행은 7명이었습니다. 그 중 4명이 의사들이었는데 우리 둘 외에 윤 박사 옆에 이명수(李明秀) 교수(안과, 1943년 세브란스의전 졸업, 전 이화여대부속병원장)와 이 사진에는 없지만 주정빈(朱珽彬) 교수(정형외과, 1944년 세브란스의전 졸업, 미국 Letterman 육군병원 유학)가 끼어 있었습니다. 여학생은 정치인으로 민중당 당수를 지낸 박순천 여사의 따님(부친은 전 성균관대 총장인 변희용 박사)입니다.

미국 유학 가는 배위에서 찍은 사진

윤덕선 박사는 나보다 6년 선배격이고 같은 이북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 분은 평양고보와 경성의전을 거쳐 외과를 전공했고, 나는 함흥고보와 세브란스의전를 졸업하면서 임상병리학을 전공하여 하나도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주일간 꼬박 같은 솥의 밥을 먹으면서 자나 깨나 함께 지나다 보니 친숙해지면서 무척이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내가 임상병리 레지던트로 간다니까 윤 박사도 병리학을 공부하러 간다고 무척이나 친근감을 보였었습니다. 이 때 이미 윤 박사는 1954년초 백병원에 혈액원을 개설하여 그 실무를 담당하다가 유학을 떠나는 참이었으니 방역연구소에서 미생물학 실험이나 하다가 떠나는 나보다는 훨씬 병원검사실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외과의사가 외과가 아닌 병리학 공부로 유학을 떠났던 것도 그런 연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윤 박사는 당시 백병원의 부원장이었습니다. 백병원 창설자이신 백인제(白麟濟) 박사가 6.25때 납북되고 김희규 박사가 원장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윤 박사는 모교 경성의전이 없어진 것이 몹시 원통해 하면서 어떻게든 백병원을 바탕으로 본인의 모교를 재건하겠다는 결의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그 꿈은 결국 양기섭(梁基涉) 신부와의 합작으로 가톨릭의대를 만들면서 현실화되었습니다. 이름은 설혹 경성의전이 아니었지만 당시 성신대학 의학부의 교수진 구성을 보면 그것은 경성의전의 분신임에는 틀림 없었습니다.

한 배를 타고 갔던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뉴욕 근처에 정착하였는데 윤 박사 혼자만이 좀 떨어진 코네티컷(Connecticut)로 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휴일만 되면 윤 박사가 뉴욕 쪽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거리였지요. 그러던 어느 주말 우리는 거꾸로 그 분를 찾아 브리지포트(Bridgeport)로 갔었지요. 일식집에서 좋은 대접을 받은 후 우리는 그 분를 따라 임창영(林昌榮) 박사댁으로 갔었습니다. 임 박사는 우리나라 독립투사이자 오랫 동안 서재필 박사의 비서 역할을 한 분이고 후일 서재필박사에 관한 책도 쓰신 분이지요. 그 당시에는 대학의 정치학교수로 있었는데 1960년 장면(張勉) 내각 때 유엔대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윤 박사는 이 때도 그 교류 범위가 우리들 일반 의사들과는 격이 달랐습니다.

아래 사진은 윤 박사가 근무하던 브리지포트(Bridgeport)에 놀러 갔을 때 임창영 박사 가족과 같이 찍은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이명수 교수, 윤덕선 박사, 그리고 같은 배를 타고 간 고고학(考古學) 대부인 김원룡(金元龍, 1922∼1993, 전 한림과학원 객원교수) 교수, 그 뒤에 앉은 분이 후일 제일병원을 창립한 산부인과의 노경병(盧庚昞) 원장입니다. 노 원장은 미국유학 당시 같은 배를 타고 가지는 않았지만 나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였기에 늘 함께 어울렸습니다.

임창영 박사 가족과 같이 찍은 사진

사람의 인연은 참 묘하지요. 내가 1956년 피츠버그(Pittsburgh)로 옮겨가자 이 임창영(林昌榮) 박사가 또 피츠버그 여자대학의 교수로 옮겨오게 되었고, 내 친구 노경병 박사도 같은 도시로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피츠버그에는 약 30명 정도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유명한 양기섭(梁基涉) 신부가 우리를 초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찾아가 보았더니 커다란 단독 주택에 혼자 살면서 “자기는 한국 학생들을 돕는 일과 서울에 새로 세울 가톨릭 의과대학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여기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푸짐한 음식을 대접받고 다시 한번 양기섭(梁基涉) 신부의 수완(手腕)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에는 윤덕선 박사가 피츠버그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양 신부를 만나려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분 사이의 구체적인 협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좋은 합의를 보고 떠났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여하튼 브리지포트에서 만났던 한국인들이 다시 피츠버그에서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윤 박사가 귀국한 것이 아마도 1956년 가을이었을 것인데 “개인 가정사정으로” 귀국하였다는 것은 잘 몰랐던 사실이군요. 처음부터 2년 예정으로 유학을 떠났고 병리학 1년 마친 후에는 외과에서 수련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귀국하였다면 무엇보다도 소원이던 경성의전 재건의 전망이 섰다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저는 1958년에 귀국하였는데 2년 먼저 귀국한 윤 박사께서는 아내와 딸을 비롯한 우리집 식구들 주치의 노릇을 착실히 해 준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집 식구들에게 아프면 백병원 윤 박사를 찾아가라고 지시 하였었거던요. 당시에는 그 만큼 윤 박사가 내게는 든든한 후견인이었던 셈이지요.

참고하시기 바라오며 또 하나 찾은 자료는 “백병원의 혈액원”에 관한 사항인데 “한국헌혈운동사” 32쪽 “기타 병원들의 혈액원” 제하에 윤박사의 업적이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 책은 고(故) 김기홍(金箕洪) 교수가 수집한 자료를 그의 유언에 따라 저와 강득용(姜得龍) 교수가 정리한 것인데 아마 한림대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을 줄 압니다.

이삼열 [2004년 6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