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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원 발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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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 설립(Ⅲ) 1976~1982 리스트보기

한림대학 설립까지 (1975. 5 - 82. 2)

성심자선병원

75년 1월 29일. 그동안 공사에 박차를 가하여 74년 말 건축완료된 성심자선병원 신관 건물이 지하 1층, 지상 6층, 옥탑 1층(기계실, 성당) 건물(연건평 4,240평)이 건축완료되어 준공을 보게 되었다. 공사는 대우개발에서 시공하였다. 본 신관건물은 원래 간호원 기숙사, 임상연구소, 임상영양연구소, 정신과 입원실, 창고, 목공실 등 기타 의학도서관, 점자 도서실, 강당 부대사업 근거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본 재단 이사인 Moffett 신부가 15년간 백령도에서 고아원, 병원, 결핵요양원 등 구호사업에 헌신하시다 서울로 전출된 후 극빈환자를 위한 자선병원을 설립을 추진하었다. 그러나 메리놀 본부로부터 아프리카로 전출명을 받아 계획 추진이 한 때 중단되었으나 Moffett 신부의 개인사정으로 한국내에 머무르게 되어 자선병원 계획을 다시 추진하였다.

당시 서울시로부터 대지 제공 의사를 받고 영등포구 양평동 소재 군부대 이전토지를 물색하였으나 대지가 협소하고 특히 건축비를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하며 설혹 설립한다 하더라도 독립된 자선기관으로서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어 윤덕선 이사장께서 우리 재단에서 자선병원을 운영하도록 하여 1975년 1월 30일 성심자선병원 개설 허가를 받아 동년 2월 18일 신관 2층과 현 응급실 자리를 확보하고 50병상으로 개원하였다.

내과, 소아과, 외과를 개설하고 서울시 새마을 상록회 영등포지부, 영등포구청, 관악구청, 인근 천주교회 등에 진료권을 발급하여 단기간 진료 또는 수술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극빈 환자를 선택하여 의뢰하도록 하였으며 만성질환, 노인성질환은 받지 않기로 하고 모든 운영은 전적으로 한강성심병원에서 지원하였다. 의사 4명, 간호원 10, 기타요원 10명 외에는 모든 인력을 한강성심병원에서 지원하고 급식·수도·전기·냉 난방도 한강성심병원에서 공급받고 있었다.

1975 년말 입원환자 25-30명, 외래 평균 50-60명의 환자를 돌보게 되었다. 이 때 병원에 필요한 일부 의료기자재는 한미재단의 원조품으로 충당하였다. 개원 11개월 동안 운영비는 75년말 125백만원 정도가 사용되었으나 기타 관리비를 합하면 상당한 운영비가 투입되었다. Moffet t 신부가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원내에서는 새로 부임한 전병훈 박사가 행정담당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심자선병원은 77년 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더욱 발전이 어려워졌고 의료 보험 확대와 농어촌보험이 시작되면서 운영명분이 약해져서 1982. 7. 20일에 8년 반만에 문을 닫았다.

인간과학연구소

75년 1월 1일 본 연구소가 정식 발족하어 초대 연구소장에 장익열 박사가 취임하였다. 그 동안 본 재단이 추진하고 있던 의학문헌조사실, 공산권의학 연구실이 필동성심병원에서 이전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신관 지하실에서 활동하던 맹인점자도서실이 신관 3층으로 이전하였고, 천주교 구라회를 인수받아 운영하게 되었다. 79년 8월 20일 제3대 소장에 강성구 박사 취임하였으며, 6월 1일부로 신관 2층 자선병원내에 동양의학인 침구연구실을 신설하여 관련 연구사업, 복지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다.

부설 연구실 및 기관별 개요
  • 의학문헌 조사실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의학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지만 학술연구 논문들에 대한 색인집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의학도들의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국내에서 발표된 모든 의학 연구논문들을 색인하여 국제 표준 방법으로 Index Medicus를 출판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도 3월의 일이었다. 그 동안 1971년도 이후 국내에서 발표된 모든 연구논문을 총정리하여 4권의 Index Medicus을 출판하였으며, 이를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등 세계 각국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방대한 작업을 수작업으로 하기에는 매우 큰 어려움이 있었고 KDI에서 별도 전산화 작업으로 색인집이 나오기 시작하여 77년 12월 15부로 폐쇄하였다.
  • 공산권 의학연구실
    공산국가내에서의 많은 연구논문들은 그들의 정치성 때문에 폐쇄적인 것이 보통이지만 특히 북한의 연구활동은 거의 외부에 알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쇄국주의 정책과 그들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국민생활을 우리 자유세계와는 근본부터 판이한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 동족이면서도 우리나라와 가장 험악한 적대상태에 놓여있지만 언젠가는 서로 만나야 할 운명이며 그것이 민족의 염원이기도 하였다. 남북대화의 가장 큰 장벽인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초월하여 인간이 사는 어느 세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간 생명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데 가장 쉬운 열쇠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북한의 보건의료제도, 의학교육, 의학연구활동 등 공산권 의학 연구를 목적으로, 1973년 3월부터 우리나라의 정보기관 및 일본, 미국, 홍콩, 영국, 불란서 등 각국의 학계, 도서관, 정보계통을 통하여 북한의 의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이미 학술대회에서 발표도 하였을 뿐 아니라, 연구결과를 75년 10월과 77년 5월 두차례에 걸쳐서 발표한 바 있다. 공식적으로는 1983년 3월1일부로 한림대하으로 업무를 이관하였다.
  • 맹인점자 도서실
    당시 국내 10만여명의 불우한 맹인들에게 향학열과 삶에 대한 희망을 주기 위한 사업으로 71년 1월부터 운영하였다. 2,500여권의 점자 도서, 200여개의 녹음테이프, 녹음기 등의 시설을 갖추고 전인 점역사 2명, 교정사 1명이 점자 도서제작을 담당하였고, 메일링 시스템(mailing system)으로 전국 맹인들에게 도서대출을 보급하였다. 75년 3월 1일 인간과학연구소에서 인수 병합하였고, 77년 10월에 대한적십자로 업무를 이관하였다.
  • 천주교 구라회
    구라회 사업은 천주교 Joseph Wseeney 신부가 6.25 동란 직후 우리나라에 와서 나병 환자들을 위하여 그의 일생을 바치면서 시작되었다. 1971년 Joseph 신부가 별세하고 그의 사업이 Moffett 신부에게 인계되었으며 1974년 4월에 이를 다시 발족하였다. 1975년 3월 1일부터는 본 재단 인간과학연구소에서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79년 1월 1일 Moffett 신부에게 다시 인계하였다.
    당시 충청남도 예산, 홍성, 서산, 당진, 아산, 창원 등 6개군을 담당하여 순회진료반을 월 1회 파견하였으며, 각 군에 1명씩 Paramedical Worker를 고정 배치하여 양성 나환자들의 색출과 이미 진단된 나환자들에 대한 투약을 하였다. 본 구라회의 운영은 서독 구라회의 보조와 본 재단의 지원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나병환자의 수가 많이 감소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 HUDEI (Human Development/East Inc.)와의 유대관계
    HUDEI (Human Development/East Inc.)는 미국 하와이에 본부를 둔 비영리 법인체(대표 윤덕선 박사)로서 본 연구소와 협력하여 출판사업 및 문화교류사업을 하였다. 사단법인 HUDEI는 1975년 미국 하와이 호놀루에서 아시아 등 동양 여러나라의 문화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인사들이 모여 설립하였으며, 본재단의 이사장 윤덕선 박사께서 동법인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동서 문화교류, 연구학자의 교환, 동양철학 사조 일환에 대하여 출판을 통하여 널리 소개하며 또한 의학도들의 유학 및 장학금 보조 등을 목적으로 하는 운영체로써 면세, 비영리법인으로 미합중국 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된 것이다.
    "Chinese Mind in the Making", "microsurgery"를 출판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성심중앙유지재단 산하 의학도들의 해외유학을 도와주었다.
  • 침구연구실
    5,000년 이상 역사를 지닌 동양의학은 르네상스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서양 과학문명에 의해 발달된 현대의학 때문에 완전히 그 자취가 가리워지게 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발달이 날을 거듭할수록 여러 분야에서 동양의학에 대한 재탐구를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현대의학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세월 동안 쇄국주의 사회에서 살면서 서방인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해 우리 본래의 수천 년의 전통을 지닌 동양의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왔다. 동양의학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면서 단순히 서양의학만을 사용해야만 위대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서 탈피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고 보아 재단에서는 1973년부터 미합중국의 의과대학에서 동양 침술의학에 관한 많은 동물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이도칠 교수에게 연구자들을 파견하여 그로부터 여러 가지 연구 방법들을 습득하면서 자료수집을 하였다. 한편 1976년 6월 1일 최태암, 권오현 두 침구사가 취임하여 신관 2층 자선병원 내에 연구실을 정식으로 발족하였으나, 여차한 이유로 2년후인 78년 9월20일에 폐쇄하였다.
  • 인간과학 편집실
    1977년 2월 의학 및 인간과학 전반에 관한 학술지 "인간과학"을 발행할 작업을 시작함으로써 발족되었으며 1977년 3월에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편집실은 수명의 편집위원과 2명의 실무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인간과학" 잡지발행 외에도 HUDEI, Index-Medicus 인구문제연구소 등의 각종 출판업무를 보조하였다.
    편집실은 또한 각종 연구실과 사회복지기관(의학문헌조사실, 공산권의학연구실, 점자도서실, 천주교구라회, 침구연구실) 등의 각종 연구업적의 출판을 통해서 수시로 소개 발표하는 동시에 Index-Medicus, Microsurgery 등의 보조출판 사업 등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연구소 내의 각종 연구실과 사회복지 기관이 폐쇄 또는 분리, 이관(타기관으로의 이관됨으로써 업무가 축소되었으며 현재는 기관지인 "인간과학의 발행업무를 맡고 있는 편집실만 남아 의학부문에 관한 논문을 주로 하는 월간 "인간과학" 학술지의 발행을 계속해 왔다.
임상영양연구센터

75. 02.05
그 동안 필동소재 성심병원에 소재하고 있던 임상영양연구센터가 이날부로 한강성심병원 신관 3층으로 이전하고 각종 연구실을 개설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74. 03
일본국제협력사업단(JICA)에 의료협력원조를 요청하여 75. 9. 9에 JICA 의료협력 실시 조사단이 내한하여 기술협력 협의서에 쌍방이 합의함으로써 의료기술 협력사업이 시작되었다.
한국인의 상용식품과 질병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한국인의 영양상태를 개선시켜 국민체위 향상과 건강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동 센터는 그간 명의는 중앙 대학교 소속으로 되어있었으나 82. 3. 1부로 한림대학으로 정식 이전되었고, 1986년 3월 한림대학교 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는 한국인의 식품영양조사, 신체발육과 식품과의 관계, 식품과 질병과의 연관성, 식품 중의 발암물질 검색, 모유 및 이유식의 영양성분조사 사업 등을 실시하였다.
그 동안 77. 6, 77. 7, 78. 11, 4차에 걸쳐 원조기자재가 총 95종 102점 도입되었으며 11명의 임상교수 및 연구원들을 일본관계기관에 파견하여 연수하였으며 11명의 전 문가가 방한하여 연구지도를 하였다.

79. 05
초대소장 안부호박사의 급서로 연구소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대학으로 이전하여 주진순 교수가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닦게 되었으며 그간 한· 일 영양심포지움을 12회나 한일간 교대로 주최하였고 연구업적집 제8집까지 발간 하였다.

역대 연구센터 소장
  • 초대 : 안부호 교수
  • 2대 : 김철 교수
  • 3대 : 방창덕 교수
  • 4대 : 김동준 교수
  • 5대 : 이동호 교수
  • 6대 : 주진순 교수
인구문제연구소

75. 10. 11 1965년 7월에 경제기획원 산하 사단법인 인구문제 연구소를 발족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추진상 인구문제에 대한 조사평가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75. 10. 11 이사회에서 윤덕선 박사를 새로운 이사장으로 선임케 됨으로서 본 병원과 관계를 갖게 되어 연구소를 신관 1층으로 옮겨 새로운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 이사장 : 윤덕선
  • 소장 : 나세진
  • 부소장 : 김수명, 윤종주

연구소는 「인구문제 논집」을 발간하고 77. 3월부터 영등포지역과 청량리지역의 인구·보건 실태조사를 실시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978. 1월 미주산업 박은태 신임 이사장에게 연구소를 이관함으로써 마감하였다.

마리아나 의료원 (해외 의료기관 용역사업)

1973년 미국령 괌도의 천주교 아가나 교구의 Flores 주교는 주민들과 합심하여 주민들의 의료보건 문제를 해결하고자 마리아나병원을 설립하여, 본 재단에 한국 의료진의 지원을 요청하여 왔으나 현지 용역회사의 개입 관계때문에 거절하게 되었다.

그 동안 Flores 주교는 교구의 모든 자금을 동원하여 병원건물을 건축이었는데 본 재단 이사인 Edward J. Moffett 신부를 통하여 1976년 1월 모든 운영권을 위임한다는 조건으로 용역사업을 요청한 바 동년 2월 괌도에서 일차회담을 갖고 일절의 운영권을 위임받아 운영하기로 잠정 합의하였다.

그 동안 용역회사의 불신관계로 건축에 투자한 Aetna 보험회사가 더 이상 건축자금 제공을 거부하여 왔으나, 본 재단이 운영을 맡게 되면 건축자금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는 San Francisco 회담이 있었다. 본 재단에서는 76년 2월 23일 보건사회부장관의 사업 추천을 받았고, 2월 25일에는 노동청장의 인력 송출 허가를 얻었다. 또한 한국은행 총재의 해외투자에 관련 사항에 대한 허가를 얻어서, 1976년 4월 23일 정식으로 용역체결을 하고 중단되었던 건축공사를 재개하였다.

  • 마리아나병원의 운영용역 계약 내용
    서문(序文): 괌도 소재 비영리법인 Medical center of the Maranas (MCM)는 한국의 의료법인 성심중앙유지재단(Sungshim Hospital Foundation, SHF)에게 한국의 우수한 전문적 병원관리와 전문의료기술을 도입하여 MCM을 운영할 것을 다음과 같이 약정한다.
    1. MCM 이사회는 병원재산에 대한 권리 및 관리권을 가진다.
    2. 병원운영을 위한 장비구입과 운영자금을 위하여 SHF는 220만불의 보증신용장을 개설하여 운영능력을 표시한다.
    3. 병원운영에 필요한 물자는 가능한한 한국에서 구입한다.
    4. SHF는 MCM의 제반 회계, 예금, 지출에 대한 지시감독을 한다.
    5. SHF는 MCM을 대신하여 모든 대외관계, 계약, 보수, 보험 등 자산 관련사항에 대한 조정, 계약, 감독을 행하고
    6. MCM의 모든 직원의 급여 및 임면에 대한 권한을 SHF가 가진다.
    7. 창업에 따른 모든 비용은 MCM이 SHF에 상환한다.
    8. 개원 후 5년간은 자체상환금을 상환하고 5년후 부터는 수익의 40%는 SHF의 용역대가로 지급한다.
    9. 본 계약기간은 10년간이며 별 이의가 없으면 자동연장된다.
  • MCM 이사회의 구성내용
    괌도의 천주교 아가나 교구장인 Flores 주교가 설립한 재단의 이사회는 현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운영용역 조건으로 현지인 5명과 본 재단 대표 5명으로 이사회를 재구성하였다. 또한 모든 결정사항이 부의되는 회의에는 본 재단의 대표권자로 위임된 Edward J.Moffett 신부를 참석케 하여 이사의 권한을 행사하여 왔다.
  • 개원준비
    1976년 4월 23일 정식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이행 조건의 하나인 220만불의 보증신용장을 개설하여, 본 재단측의 의무사항을 실행하였다. 따라서 그 동안 중단되었단 700만불의 공사자금(Aetna 보험)이 제공되어 건축을 계속할 수 있었고 의료기자재의 일부는 본 재단이 개설한 신용장을 담보로 현지금융으로 구입하였다.
  • 인력송출
    본 재단에서는 MCM이 정상 운영이 될 때에는 310여명의 직원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필요 인원의 반을 한국인으로 충당할 계획을 세웠다. 1978년도까지 150여명의 한국 의료진 및 기술자들을 송출할 계획이었으나 1976년 말 미국 이민법의 개정으로 한국에서의 의사, 간호원, 약사 등이 미국내 취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까라서 당초 인력송출 계획에 막대한 지장이 발생하여 사실상 인력송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소수 인력만 송출하여 병원운영을 꾸려가야 했다.
    1. 취업비자 취득 송출인원: 의료기사 9명, 일반기술자 23명, 행정요원 4명
    2. 일반비자 송출인원 : 의사(유자격) 8명, 간호원(유자격) 3명, 약사 2명
  • 개원
    병원건축을 완료와 함께 1976년 12월 5일 Dedication Ceremony를 거행하고, 1977년 1월 31일 병원 개원을 하게 되었다. 계획상에는 1976년 7월경에 개원 예정이었으나, 태풍으로 인한 피해와 건축자재 조달 지연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개원이 지연되었다. 소수의 한국인과 현지인으로 구성된 직원들로 총규모 148병상의 현대식 병원을 개원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환자진료 실적이 1년도 되기 전에 70%라는 높은 수용률을 내게 되었으나, 막대한 차관자금에 대한 이자와 초창기 운영자금 도입 관계로 수지상으로는 순이익을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건실한 발전의 여건이 조성되어 개원 2년후인 1978년에는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 용역사업 종료
    아가나의 Flores 주교는 교구의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고, 병원 운영주체를 본 재단으로 교체하였으며, 또한 태풍에 의한 제반계획 차질 및 교회 신도들의 약속된 기부금 불이행 등으로 융자금 상환이 2년 이상이나 지연시켰다. 이러한 관계로 GUAM 정부에서 교회 채무를 해결하게 됨에 따라 본 재단으로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어 MCM 운영을 끝내게 되었고, 투자회수는 2년 이상 걸려 해결되었다.
[참고내용]

박희영: "미국에서의 법의관 역할과 항공사고 처리 경험"에서 인용

"괌 기념병원은 우리나라와 인연이 있는 병원입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미군이 사용하던 병원을 괌 정부에서 인수를 받아 운영하기로 하였지만 여러가지 재정지원 등 문제로 말미암아 가톨릭 교구에서 이를 맡아 운영키로 합의하였습니다.

이 병원의 운영에 필요한 여러가지 지원을 전세계 가톨릭 교구에게 지원요청을 했는데 우리나라 한림대학교의료원을 설립하신 고 윤덕선 박사께서 흔쾌히 이를 받아들여 성심병원의 의료진을 파견하여 병원운영에 보탬이 되도록 지원하여 오늘날의 병원으로 육성 발전하게 된 것을 아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을 줄 압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을 처음으로 해외에 진출한 사례로서 그 대상국이 후진국이 아니라 미국이었다는 점은 뜻깊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산성심병원과 강남성심병원 개원

동산성심병원 전경 사진

동산성심병원의 전신인 서울동산병원은 부지 1,360평과 건물 764평을 총무처와 불하 계약을 75년 4월 14일에 체결하고 현주소로 이전하게 되었으나, 부지와 건물대금의 분활 납부를 하지 못하여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사로 계시던 윤덕선 이사장께 인수의사를 제의하여 본 재단에서 할부택지 권리의무를 포괄승계를 함으로서 서울동산병원을 이날 부로 인수하였다.

76년 8월 11일 의료법인 동산의료재단을 설립하였으나, 77년 4월 20일 법적 해산함으로서 완전히 인수하였다. 동산성심병원으로 개칭하고 초대 병원장에 한경준 박사가 취임하여 계속 발전 운영해왔으나. 1999년 평촌의 한림대성심병원 개원과 함께 폐원하였다.

한림대학교강남성심병원은 80년 1월 11일 개원하였다. 신축공사 14개월만에 지하 1층, 지상 10층, 연건평 1,788평의 병원이 완공되었다. 건물은 79. 12. 31 준공검사를 필하고 이날자로 환자진료를 시작하면서 400병상으로 강남성심병원이 시작되었다. 앞서 79. 5. 1부로 병원장에 장익열 박사, 부원장에 박동림 박사가 취임하였다.

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 확장 및 발전

75. 11.12
영등포동 7가 94-17(598㎡)와 동소 94-102번지(694㎡)를 매입하여 정구장으로 축성함으로써 많은 직원들이 애용하다가 후에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니 지금 노인보건의료센터 부지이다.

77. 09.01
제일별관을 구입하여 기숙사, 도서실, 경리부, 의과학클리닉으로 사용하게 되었소, 78. 1. 18 본 병원은 신관의 기숙사, 경리부, 인간과학연구소 등을 별관으로 이전함으로써 350병상에서 400병상으로 증설하게 되었다.

78. 05.13
전산실, 보험과, 인턴숙소가 있는 부지를 매입하여 주방숙소로 사용하였으며 건물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75. 09.13
제1차 원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77. 10.01
제2대 원장에 송호성 박사가 취임하고, 방창덕 병원장은 재단 상임 재무이사로 보직변경하였다.

서울보건연구회

서울보건연구회 회원 사진

윤덕선 이사장의 제안으로 보건, 의료에 대한 연구와 친목을 목적으로 8명의 관계 인사들이 80년 2월 1일 모임을 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보건의료의 과거와 현재를 밝히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정립하자는 의도에서「국민보건백서」를 발간하기로 하고, 본 재단의 주도하에 연구사업을 시작하였다. 80. 5. 18∼19 양일간 제1차 세미나를 개최하고(충남도고) 제2차 세미나를 81. 3. 6에 개최하여 국민보건백서 상·하권을 발간하게 되었다. 추가사업은 계속하지 못하였으나 큰 업적을 남겼다.

회원으로는 윤덕선 이사장, 권이혁 서울대총장, 송호성 의무원장, 김효규 연세대부총장, 양재모 연대보건대학원장, 정희섭 전보사부장관, 조규상 가톨릭의과대학장, 김수명 본 재단 사무총장 이상 8명이었으며 백서 출간 필진으로는 회원을 포함하여 고응린 교수를 비롯한 35여명의 교수들이 그 동안 많은 수고를 하였다.